춘강 조동식 위기 속에서 빛난 춘강의 뜻

위기 속에서 빛난 춘강의 뜻

01

나라 잃은 아픔

의암 손병희 선생
1919년 3·1운동의 여파 속에서 춘강 선생도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선생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춘강이 교육자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였습니다.

의암 선생은 동원·동덕 합병 시 동덕여숙에 매삭 10원씩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지원한 인물이 었습니다. 그는 동학 제 3대 교조로서 정치적, 사회적 덕망과 영향력이 대단히 컸고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상황이었습니다. 훗날 의암 선생은 그의 딸인 손용화, 조카딸 손문화 두 사촌자매까지 동덕여학교에 보내 춘강의 민족교육을 받게 했고, 그들은 동덕의 1회 졸업생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1919년 2월에 춘강 선생의 친구인 이갑성이 춘강 선생을 찾아와 조만간 있을 민족운동의 선봉대 격인 학생들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춘강 선생이 추천한 동덕의 학생은 연락원으로서 활약하면서 민족운동의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02

춘강의 교육 동지들

좌측 아래부터 춘강 조동식, 학봉 이석구
					좌측 위부터 안도, 석제 이경세
3·1운동의 여파로 동덕여학교의 경영은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동덕여학교의 경영자이자 재정 지원자였던 의암을 포함한 천도교의 간부 다수가 감옥에 수감되면서 재정적 지원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2년 2월에 일제는 신교육령을 제정하여, 고등보통학교가 되어야 학교로서 인정받고 상급학교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사립학교들을 통제하여 조선의 교육열을 잠재우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험난한 과정 끝내 춘강 선생은 1926년 4월, 4년제로 승격하는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받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정난이 계속되자 춘강 선생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막역한 친구인 석재 이경세(石濟 李慶世)에게 상의하였고, 석제는 자신의 친구 안도(安濤)와 상의하였습니다. 안도의 도움으로 춘강 선생은 충청남도 보령의 거부 학봉 이석구(學峯 李錫九) 선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춘강은 학봉을 교육사업에 관여하도록 여러 차례 설득하여 마침내 ‘1년에 일천 원 한도로 몇 번에 나누어 드리리다.’라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03

구인회(九忍會)

구인회 동지들과 함께
1937년 일제가 만주와 중국 본토 등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가 극에 달하면서 교육계의 어려움은 더해갔습니다. 1938년 3월 일제는 개정 조선 교육령을 시행하여 학교명을 일본인 학교처럼 개명하고, 정규과목이었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꾸고 사범학교의 2부제를 폐지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없게 했습니다. 이후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과 궁성요배,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학교의 존폐여부는 모두 조선총독부 문부성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사립학교 경영자들은 그 처지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일이라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립학교 교장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시국을 해쳐나가기 위한 모임을 갖고 ‘아홉 번 참자’는 뜻의 구인회(九忍會)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훗날 한국 현대교육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04

재단법인 영우학원

재단법인 영우학원
동덕여자대학을 설립하면서 춘강은 재단법인 영우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영우학원은 본래 사회 교육협회라 하여 해방 후 춘강이 만든 문화단체로 민족문화운동 전개를 목표로 세워진 것이 었습니다. 사회교육협회는 전북 고창의 유지였던 홍종철의 기부금으로 1945년 10월 설립되었습니다.

한편 민족문화 발전에 관한 업무는 문교부에서 주관하여, 이를 학교교육을 통해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회교육협회도 자연적으로 사업목표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동덕여학교의 후원회장은 홍순필은 친분이 있던 홍종철에게 사회교육협회를 동덕여자대학 경영을 위한 재단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논의 끝에 사회교육협회의 목적으로 동덕여자대학 경영을 위한 단체로 변경하고 그 명칭을 재단법인 영우학원으로 고칠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영우학원이 설립되기 전부터 일부에서는 동덕여자대학 육성에 관한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었으나 춘강은 제대로 된 학교교육이라는 것은 장기적인 전망으로 참을성 있게 계획하고 추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덕여자대학 경영 포기에 관한 의견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동덕여자대학의 존재는 춘강 선생의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의지, 그리고 신념과 열정이 이루어 낸 또 하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후 춘강은 재단법인 영우학원을 동덕여학단에 귀속시켰습니다.
05

8·15 광복의 순간과 춘강

동덕여자대학 학창 시절의 조동식 선생, 춘강 선생의 서재(춘강 기념관 재현)
내가 간직한 국기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야만적인 한일합방 전까지는 국가나 학교의 경축일에 반드시 교문에 나부끼던 이 국기는 일본의 식민지 정치에 의하여 일본 국기로 바뀌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땅 속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국기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서글픈 심정을 달래면서 마음속으로 조국은 잃었으나 너만은 잃지 않고 광복의 앞날을 위하여 나의 애국지성을 바치겠다고 되새겨 다짐하였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실패하고 고대했던 독립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지도적 지위에 있는 인사들의 가택을 수색한다는 정보를 들은 나는 장롱 속에 숨겨 둔 국기가 발각될까 두려워서 재빨리 장독대 밑에 그 국기 상자를 묻어 두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국은 해방되고 광복의 날은 왔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곧 함 속의 국기를 꺼내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정중히 펼쳐 보았다. 오랫동안 햇볕을 못 본 국기는 여기저기 좀이 먹어 구멍이 뚫렸으나, 형체는 그대로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국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엎드렸다. 나는 곧 공손히 보에 싸 가지고 학교에 달려가서 국기 게양대에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내가 간직한 국기」, 『민주생활 I』(1973.3.1. 발행된 중학교 교과서) 중

춘강 조동식 기념관 / 주소 : (02748)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13길 60 (하월곡동) 동덕여자대학교 동덕르네상스홀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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