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의 여파 속에서 춘강 선생도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선생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춘강이 교육자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였습니다.
의암 선생은 동원·동덕 합병 시 동덕여숙에 매삭 10원씩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지원한 인물이
었습니다. 그는 동학 제 3대 교조로서 정치적, 사회적 덕망과 영향력이 대단히 컸고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상황이었습니다. 훗날 의암 선생은 그의 딸인 손용화, 조카딸 손문화 두
사촌자매까지 동덕여학교에 보내 춘강의 민족교육을 받게 했고, 그들은 동덕의 1회 졸업생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1919년 2월에 춘강 선생의 친구인 이갑성이 춘강 선생을 찾아와 조만간 있을 민족운동의
선봉대 격인 학생들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춘강 선생이 추천한 동덕의 학생은
연락원으로서 활약하면서 민족운동의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