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강 조동식 1908년 그 봄에 피어난 꿈

1908년 그 봄에 피어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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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 조동식 선생의 시작

춘강 조동식 박사
춘강 조동식(春江 趙東植) 선생은 1887년 8월 26일 오전 10시, 서울 북촌의 작은집에서 가난한 선비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세 되던 해인 1904년 4월에 관립한성한어학교에 입학, 삼 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1907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그는 마음속 깊이 교육 사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경성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며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경성고아원은 80명이 넘는 학생들을 돌보며 교육했습니다.

그 후 1908년 사립기호학교 사범과에 재학 중인 몸으로 동원여자의숙을 창설하여 그 설립자가 되었고, 기호학교를 졸업한 후, 동원여자의숙을 동덕여자의숙과 병합하여, 이를 동덕여학교로 승격시켰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으니 이것이 곧 동덕여자중학교의 전신입니다.

당시 아직도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여성교육에 선구자적 사명을 수행하였으니, 이것은 일제의 기반 속으로 들어간 우리 국권과 민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민도의 향상과 실력의 배양이 가장 급선무라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성교육이 더욱 간절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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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로서의 첫 걸음

소안동 98번지 동원여자의숙 숙사, 소안동 98번지 동원여자의숙 숙사
1908년 봄부터 춘강 선생은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춘강 선생은 기호흥학회의 설립에 참가하여 평의원이자 경성고아원의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바쁜 와중에 새로운 학교의 경영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오랜 숙고 끝에 여성교육이야 말로 자신의 사명임을 깨닫고 여성교육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던 그에게는 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할 만한 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되는 대로 방 한 칸이라도 마련되면 소규모나마 학교를 열기로 하고 교사(敎舍)를 물색했습니다. 다행히 그 무렵 집안의 형님뻘인 조봉식씨의 소안동(현재의 안국동) 초가 한 칸을 빌릴 수가 있었습니다. 초가집이었지만 춘강 선생의 집보다는 큰 방이었습니다. 그는 동원여자의숙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1908년 4월 28일 1년제 보통과정(야학)을 개설했습니다. 당시 춘강의 나이는 22세였습니다. 오늘날의 동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909년 봄에 동원여자의숙은 그런대로 안정된 기반에서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다른 민간인 설립의 여학교들은 재정상의 이유로 하나 둘씩 폐교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에 놓인 학교 중에는 동덕여자의숙도 있었습니다. 춘강 선생은 오랜 고민 끝에 1909년 4월 동덕여자의숙과 동원여자의숙을 병합하기로 하고 동덕의 경영권을 인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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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교육에 헌신

제1회 동덕여학교 졸업식(1914. 3. 27.)
따님을 학교에 보내십시오.
여자도 배워야 합니다.



한문 공부만이 전부이던 당시의 상황에서 춘강 조동식 선생은 위의 표어를 내건 선전문을 인쇄 하여 선진국의 예를 들어가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양갓집의 가정 규범으로 보아 어린 딸들을 함부로 바깥출입 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었고 젊은 남자인 춘강 선생의 신원을 확신할 수 없었으니 딸을 맡길 결정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야간학교였기에 학생을 모집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젊은 교육가의 꿈은 굽힐 줄 몰랐습니다.

춘강 조동식 기념관 / 주소 : (02748)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13길 60 (하월곡동) 동덕여자대학교 동덕르네상스홀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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